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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국화재배의 역사
2. 국화재배의 역사
1) 중국의 국화 재배

최초의 국화재배는 중국에서 시작되었는데 약 5천년 전 염제 신농씨는 국화를 상품약(上品藥)으로 인정하여 수명장수에 효과가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그 근거는 확실치 않아 신화적인 것이라 하겠다. 중국에서는 국화를 약용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재배가 시작된 것 같으며, 국화의 약효를 신비하게 다룬 많은 전설이 있으며, 또 국화에 관한 많은 미신적 사상이 전해져 오고 있다.


옛날 남양의 여현 이란 곳에 감곡 이라는 개천이 있었는데 그 상류에 국화가 있어 거기서 흘러내리는 액수를 먹고 사는 하류의 마을 사람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60세는 초년, 80~90세는 중년, 120~130세는 말년이라 할 만큼 장수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선인 팽조는 아침마다 국화의 이슬을 마셨기 때문에 무병장수 하였다고 한다.


또 한의 고조는 음력 9월 9일에 후궁에서 국화주로 중양절을 축하하고 장수를 빌었다는 기록도 있으며, 후한때는 여남사람 항경이 그의 스승인 선인 비자방의 가르침대로 9월 9일에 수유와 국화주를 가지고 등산한 사이에 화를 면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는 한위시대부터 9월 9일을 달과 해가 9의 양수에 중첩되었다는 의미에서 9․9는 영구하다는 뜻에서 중양이라고 칭하고 그날은 국화주로 잔치를 베풀어 장수를 기원하는 풍습이 있었으며, 국화즙이나, 국화를 환으로 만들어 계속해서 복용하면 5백살까지 장수 할수 있다고 기록된 것도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국화를 신선비약으로 귀중하게 여겼으며, 점차 꽃의 관상적 가치도 인정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국 시대 주나라의 굴원은 국화를 성인군자에 비견하고 그 향기와 빛깔을 찬양하는 동시에 그 화판을 식용했다고 한다. 다시 삼국시대에 내려와서는 위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국화의 오미(五美)를 찬양하는 시를 읇었다고 하며, 동진의 도현명은 직접 20여종의 국화를 재배하여 이를 관상함은 물론 그가 지은 채국의 시는 널리 알려져 있다.


따라서 국화는 고결하고 품위있는 꽃으로 중국에서의 국화 숭배사상의 전통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당송시대에 이르서는 국화의 관상이 더욱 성행하여 문인묵객은 국화를 계속해서 예찬하였고, 송대에는 재배의 대가가 배출되어 국화에 관한 전문서적도 발간되었으며, 여기에는 다수의 품종에 대하여 자세하게 서술하여 놓았다. 그러나 그 후에 있어서 중국의 국화는 어느 정도 진보 하였으나 현저한 발달은 없었고 현재의 이르러서는 꽃의 지름도 별로 크지 않고, 꽃모양도 아주 단조로운 것들로 다른 나라에 비하면 우수하지 못하다.


2) 우리나라의 국화 재배

중국에서 처음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국화가 어떤경로를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많은 사람들에 인용되는 사적에는 백제 제16대 진사왕때(1,600년전) 5가지(청, 황, 백, 적, 흑색)의 국화 종자를 일본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또 일본의 왜한삼재도회(倭漢三才圖會)에는 이것을 받았다는 사실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히 오래전부터 국화를 재배해온 것으로 짐작 할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백성들이 국화를 영초로 삼아 귀신을 몰아내는데 사용하였으며, 이것을 불에 태워서 약으로 섰다는 사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조선 영조때에는 국화의 관상열이 고조되어 문인묵객들은 매, 난, 국, 죽을 사군자에 비유하여 국화의 고결하고 품위있는 덕성을 시를 지어서 노래하고 국화로 술을 빚어 즐겨 마시고 9월 9일 중양절에는 이날 하루는 국화주를 마시며 놀았다고 한다.


또한 이 꽃을 말려서 베게속에 넣어 베고 자면 풍증에 효엄이 있다고 하였으며, 식용으로 쓰기도 하였다. 이후 근세까지는 별로 발전하지 못하고 침체된 현상을 가지고 왔으나, 일제때 일본품종이 도입되고 재배인구도 점차 늘어 나게 되어 덕수궁에서 처음으로 국화전시회를 개최하게 되었고 이후 계속해서 10년동안 전시회를 개최한 결과 전문화된 국화재배가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시기는 취미재배가 대부분으로 관상을 위한 분식재배 위주였다. 그 후 해방과 6. 25사변등으로 사회가 불안정하여 국화에 대한 관심이 일시 쇠퇴하는 시기가 있었으나, 1960년대 이후 각 기관과 개인 전시회가 개최되기 시작하였으며, 2004년부터는 함평군에서 “대한민국 국향대전”이 개최되어 국화전시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고 있다.


3) 일본의 국화재배

일본의 국화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국화 종자가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수입 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일본인들은 국화를 귀중하게 여기고 재배하기 시작했으며, 일본 각지에서도 국화의 모양과 성질이 동일한 야생국이 자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자 이것을 개량 재배하여 궁중이나 몇몇 귀족들간에 관상되다가 점차 국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됨에 따라 황실은 국화를 문장으로 제정하는 등 명치조까지 국화 재배가 성행하였다.


그러나 명치유신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정이 한 때 쇠퇴한 시기를 가져오기도 하였으나 궁중에서는 국화를 재배하고 이른바 국화연(菊花宴)을 개최하여 문무백관에게 관람시켰다고 하며 또 민간인도 국화단체를 결성하고 각 지방별로 전람회를 열어서 재배기술과 신품종을 소개하여 일반인들의 국화에 대한 취미는 고조되어 마침내 국화 열광의 황금시대를 맞았다. 그러다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인하여 점차 쇠퇴기에 접어들기 시작하였고 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말미암아 쇠퇴기의 절정에 이르렀다.


일본국화가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은 것은 1926년 미국 시애틀시에서 개최된 국화전람회에 출품하여 최고의 상을 획득한 것이 계기가 되었으며, 2차 세계대전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국화 재배열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여 고도의 재배기술과 꾸준한 신품종 육종으로 오늘과 같이 발전하였다.


4) 서양의 국화재배

서양의 국화재배는 극히 근대의 일로써 최초에 네델란드인이 일본에서 국화를 가지고 가서 재배를 시작하였으나 널리 보급이 안되었다고 1689년에 발간된 서적에 기록이 남아있다.


오늘날 유럽에서 재배되고 있는 국화는 1789년 프랑스인 불랑카르가 중국에서 수입하여 재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것이 파리를 거쳐 영국에 전파되어 1795년에는 첼시아 지방의 “걸부”라는 사람이 온실에서 최초로 개화시켜 원색으로 식물잡지에 게재하였는데 영국사람들이 이 꽃의 아름다움에 경탄과 아울러 재배열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영국은 직접 동양에서 국화묘를 수입하게 되었고, 이당시 20여품종에 달하는 새로운 품종을 가지고 갔으며, 재배법에 관해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현저한 진보가 있었다.


1825년 영국의 로얄원예협회가 유럽최초로 국화전시회를 개최하였을 때 48종, 700여분이 출품되어 성황을 이루었으며 재배열을 한층더 고조시켰다.


한편 프랑스에서도 국화가 수입된 이래 점차 재배가 성행되어 수차에 걸쳐 동양에서 국화묘를 수입해 갔으며, 1827년에는 베르네가 국화재배에 성공하여 여러종류의 잡종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러 동양으로부터 수입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후 프랑스에서도 국화재배가 왕성하였고 이곳의 환경이 재배에 적합하여 많은 신품종이 작출되어 유럽에서의 새로운 품종의 공급지가 되었다.


국화가 유럽에 전파된후 처음 약 70년동안은 전부 중국국화 계통이었으나 1862년 일본국화가 영국에 소개된 후로는 유럽국화계에 일대혁신을 가져와 종래에 재배되던 중국계 국화를 버리고 다투어 일본종 국화를 재배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국화재배가 한층 더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영국에서는 매년 전시회가 개최되고 1844년에는 전영국의 재배자들 중심기관으로 국민국화협회가 창립되었다.


한편 미국의 국화재배는 유럽보다 늦은 1820년경에 시작되었는데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깝기 때문에 쉽게 우량종을 수입 할 수 있었고 국화재배에 알맞은 기후 혜택으로 잡종에 의한 신품종을 육성하게 되어 단기간에 현저하게 발달하였다. 이후 미국산 신품종이 유럽의 국화계를 휩쓸게 되어 마침내는 일본을 앞서게 되고 현재 우수한 개량품종인 절화용 품종을 일본이 수입해가고 있다.